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과거 제도 (문단 편집) === 중국 === [include(틀:수나라와 당나라 관련 문서)] [[중국]]은 과거제의 본적지로서 과거 제도의 기원은 지방 추천자를 대상으로 적합성을 시험하는 제도로 이미 [[한나라]] 때 있던 찰거 제도이다. 수나라 이전 중국에서도 한국사와 마찬가지로 [[천거]]로 인재를 발탁했고,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인재를 발탁하기 위해 관록 2천 석 이상의 관리가 3년간 근무하면 자신의 형제나 아들을 1명 추천하여 낭관으로 올릴 수 있는 제도인 임자제(任子制), [[향거리선제]], [[구품관인법]] 등 이런저런 발상을 시도했지만 각자 실제 시행 과정에서 단점이 부각되었다. 중국의 과거 제도는 중국 [[수나라]]의 선거제에서 유래하였다. [[문제(수)|수나라 문제]]가 선거제를 최초로 시행했다. 수나라 과거 제도는 24사 [[수서]]에도 기록이 과거 시행은 물론 합격자 기록도 없다고 한다. 수문제는 한나라 때의 찰거 제도를 선거라는 제도로 시행하여, 지역에서 추천한 인재들 중에서 지방관이 추천한 인재를 바로 등용하는게 아니라 적합한 인재인지를 다시 판별하는 제도였다. 수나라 멸망 이후 [[당나라]] 초대 황제 당고조 무덕 4년 (621)년 조령을 내려 각 현에서 추천한 인원을 주로 모여 시험을 보고 주에서 검증한 후 중앙으로 올려 보내라고 하면서 시험을 보는 형태가 나타난다. 다만 수-당시대 과거는 당나라가 망하고 고려시대에 쌍기가 들여온 과거의 형태와 매우 다르다. 과거 왕조의 구품중정제와 북송시기에 정착된 일반적인 과거시험의 과도기의 제도였다. 왜냐하면 첫째 정기적이지 않으며, 둘째 시험 관직임용이 성적만으로 결정되는것이 아니며[* 당나라 시대에는 이미 명사들이 자신의 문집을 여러 고관들에게 바쳐서 인정을 받으면 과거를 응시하고 응시에서 대구로 아무 내용이나 써제껴도 유명하면 합격이었으며 신언서판으로 표현하는 [[문벌귀족(중국)|문벌귀족]]들의 심사로 등용을 정했다.], 셋째 후대 명경과와 진사과처럼 명확한 기준이 아닌 시류에 맞춘 즉흥적인 기준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당나라 때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으나 과거 과도기적 성격이 강하고, 급제자가 한번에 십수명에 불과한데다가 등용도 잘 되지 않았다. 중당시기 [[백거이]]의 진사시험 동기는 16명이었다. 성당시기 천보 연간엔 응시자 모두 탈락시킬 사례가 있을 정도로 보편적으로 자리잡지 못 했다. 한편 당나라에서는 [[빈공과]]라는 외국인 전형도 운영했다. 전시 제도는 [[송나라]] 때 생기지만 황제 앞에서 최종 순위 결정전을 치르는 전시의 원형은 [[당현종]] 때 생겨난다. 그러나 당나라 때 순위 결정전인 전시는 제한적으로만 실시했다. 전시 횟수도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몇 번 안 된다. 과거 제도는 [[북송]]을 거치면서 정착되었다. 송대부터 황제의 앞에 나서서 시험을 치르는 전시(殿試)가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초시 - 복시 - 전시 3시 상설 시스템이 확립됐다. 기본적으로 과거의 경우는 합격자와 시험관 사이에 스승과 제자 관계가 성립되는데, 전시의 존재로 황제의 권위에 큰 플러스 요인이 되게 된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 체제 자체는 [[측천무후]] 시대에 이미 완성되었지만 이후 사라졌다가 송대부터 완전히 자리잡았다. 중국 과거 시험제도와 폐해는 [[진사]] 3.1 항목을 참조. 이랬던 중국의 과거 제도는 한국보다도 더 늦은 1898년에 [[변법자강운동]]의 일환으로 개혁되고, 서태후 주도로 이뤄졌던 광서신정에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마지막 과거 합격자들 중 중국공산당의 시조로 알려진 [[천두슈]]가 있는데 그는 1896년 향시, 그 다음해인 1897년 성에서 치르는 성시에 급제했다. 이 때 이미 조선에서는 과거가 폐지된 지 2, 3년 후였다. 당나라가 존속하던 시기에 신라, 발해에는 과거 제도가 없었지만 [[당나라]]는 비교적 개방적인 왕조였기 때문에 많은 신라, 발해인들이 중국으로 가 [[외국인]] 전용 [[빈공과]]에 응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라]] 3최로 일컬어진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는 모두 당나라 빈공과 급제자 출신이다. 과거 제도가 도입된 고려시대 때에도 [[원나라]] 시절까지는 중국에서 과거를 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 시험은 [[명나라]] 대에 중단되어 [[조선시대]]부터는 중국 유학보다는 국내 과거 위주로 가게 된다. 중국은 조선이나 베트남보다 인구가 훨씬 많았던 관계로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도 그만큼 어려웠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과거 시험 합격자는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고 하여 귀신조차 함부로 해칠 수 없다는 내용의 전설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또한 과거 시험에 도전하다가 실패하고 좌절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았기에, 과거 수험생들을 지켜주고 그들한테 과거 합격의 축복을 베풀어준다는 종규라는 신도 생겨났다. 다만 과거에 불합격했다가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황소]]나 [[홍수전]] 같은 불행한 경우도 나타나는 부작용이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